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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6.25 전쟁 70주년] 6.25 전쟁 알아보기

by           2020.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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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쓸지식입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죠?

아마도 6월이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된 이유는 6.25 전쟁으로 인해 사라진 많은 국군 장병들의 얼을 기리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싶어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625전쟁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뼈아팠던 과거를 되새기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오늘의 주제를 준비했습니다.

그럼 시작할게요

 

 

#1. 6.25 전쟁이란?

한국전쟁 또는 조선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통칭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계획에 따라 북이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하며 발발한 전쟁입니다.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국제전쟁으로 비화되었으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 간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2. 6.25 전쟁 전개

 

 

#2-1. 북한의 기습 남침(1950. 6. 25.)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경 38도선 전역을 침투하여 남한을 공격합니다. 당시 6월 25일은 일요일이라 남한의 병영은 비어있었기에 치밀한 계획을 통한 급침이라 합니다. 북한은 이렇게 무주공산인 남한을 침공하여 무려 4일만에 수도인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을 시작합니다.

#2-2.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1950. 09. ~)

무서운 기세로 서울을 넘어 대구까지 다가온 북한군을 막을 힘이 없던 당시 이승만 정권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 결과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 16개 나라에서 모인 국제연합군이 남한으로 파병됩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15일, 국제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되어 북한의 전쟁 보급로를 끊고 서울을 수복한 뒤 평양을 함락하게 됩니다.

#2-3. 중공군 개입(1950. 10 ~)

순조롭게 북진하여 평양까지 함락한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철수하게 되는데요. 1950년 일어난 이 철수사건을 흥남철수라 하며, 서울까지 재점령당하게 되며 1951년 1월 4일의 대규모 후퇴인 1.4후퇴까지 하게됩니다. 

#2-4. 휴전협정 체결(1953. 7. 27)

재점령된 서울을 재탈환한 뒤 38도선을 기점으로 고지전을 통한 소규모 국지전을 이어가며 3년간의 긴 휴전회담을하게 됩니다. 제안은 소련에서 먼저 했는데요. 이 휴전협정은 무려 25개월 간 지속되었고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선이 그어지며 전쟁이 중단됩니다.

#3. 전쟁의 결과

#3-1. 인명 피해

전쟁 기간 동안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명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군 사망자도 45,000명에 이르는 등 기간에 비해 사망자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그러했듯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도 특징이며, 1950년에 대부분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도 특징입니다.

일각에서는 확인된 사망자만 600만명이라 하기도 했는데, 1950년대 당시 남북한을 합쳐 한반도 인구의 총이 2~3천만명으로 한반도 인구 중 이 전쟁으로 죽은 자가 적게 잡아도 10~20%가 될 정도로 끔찍한 인명피해를 냈으며, 이는 2차 대전동안 소련, 폴란드, 나치 독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가 입은 인구대비 사망자 비율에 준하거나 맞먹는 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3-2. 정치적 결과

휴전 이후 김일성과 이승만이 자신의 반대파를 숙청, 탄압하는 대의명분으로 이데올로기를 등에 없으며 양측의 권력을 공고화하는데 안좋은 의미로 엄청난 공헌을 하게 됩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파, 남로당파, 연안파 등 조선로동당 내부의 다른 파벌들을 거의 숙청하여 북한 지도부를 종전의 연립정권 형태에서 김일성 직계인 만주파의 독식 구조로 바꿔버립니다.

남한에서는 종전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국가보안법을 이용, 야당 인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요. 이를 통해 1987년 6.29 선언 이전까지 북한과 마찬가지의 독재를 이루게 됩니다.

대한민국의 징병제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게 되는 가장 큰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4. 뼈아픈 과거

6.25 전쟁 과정과 그 이후 그리고 현재까지도 정치권에서는 이념간 대립을 이용하여 본인의 권력을 공고하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6.25 전쟁 발발과 거의 동시에 국민들에게 안심하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은 한강다리를 끊고간 이승만 정부 입장에서는 대중들의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이러한 이념을 이용하여 자행된 끔찍한 사건을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4-1. 보도연맹 학살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6.25 전쟁 중 이승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최대 규모의 자국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입니다. 아래 설명할 국민 방위군 사건과 더불어 6.25 전쟁 최악의 학살사건으로 꼽힙니다.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게 함락된 지역에서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이적 행위를 하자 우익 청년단원이라 불리는 서북청년단 등에게 소집, 연행, 구금 그리고 집단학살을 지시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정부가 단순히 보도연맹이란 집단 내에 있었단 이유만으로 이적행위로 간주, 민간인을 죽인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끔찍한 학살이자 전쟁범죄입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장면이 나오죠.

당시 보도연맹원들은 전쟁통에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입하는 자도 잇었으며, 일부 공무원들의 실적을 위하여 가입되기도 하여 이념대립과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10만명에서 30만명 이상까지의 민간인이 학살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참여정부 시절 58년만에 최초로 국가를 대표해 당시 국가에 희생된 국민들의 유가족들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사죄하기도 하였습니다.

#4-2. 국민 방위군 사건

 

진군하는 국민방위군

 

6.25 전쟁 중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강제징집한 국민방위군 수만명이 국회, 정부 및 군 고위층의 예산 횡령 및 뇌물 수수 등으로 보급을 받지 못해 그대로 희생된 대한민국 최대, 최악의 방산비리 사건입니다.

병력 수송 비용과 식비 등을 횡령하여 김종회 등 국회의원 20여명에게 공작비와 여비 등의 명목으로 제공되었으며, 그 탓에 징집된 방위군이 혹한의 추위속에서 굶주리며 기아와 동상으로 단 한번의 전투 없이 희생되었습니다.

적군이 아니고 조국인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 경시로 인하여 후방의 수많은 장병들이 굶어죽고 얼어죽은 사건으로, 전쟁 중에 발생한 사건이기에 더욱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지 6.25전쟁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6.25 전쟁은 전쟁의 발발부터 전개과정, 그 후의 결과까지 어느 하나 떳떳하게 말하기 어려운 우리의 흑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6.25 전쟁 과정에서 생긴 대규모 학살사건이나 방산비리 사건, 지도층의 무능 등이 합작되어 현재까지도 많은 아픔을 우리에게 주고 있죠.

하지만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역사를 알아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70주년을 맞이하여 6.25 전쟁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서 마칠게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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